2018년 7월 15일 일요일

성경은 게으른 자와 부지런한 자를 갈라낸다















"죄"의 성경적 정의(定義)







어떤 성경에는 예수님의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하여

붉은 글자로 특별히 표시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성령께서 감동하셨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 친히 인도하심을 따라 
글로써 표현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그런즉 "내 말을 지킨다"는 말씀은 

사도들을 통해 
또는 옛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총망라해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물론 "새 계명"으로 집약되어 있고
그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세히 이해하는 데에는 
성경 전체를 조화시켜 보는 안목이 절대적입니다. 


열매 맺음ㅡ생명의 법칙 따라 살기 시작하는 결과물 (2-끝)












"너희 죄가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사 1:18)



2018년 7월 14일 토요일

열매 맺음ㅡ생명의 법칙 따라 살기 시작하는 결과물 (1)










우리가 죄 중에 살겠느냐.
"죄에 거(居)하겠느냐"(롬 6:1).
죄를 짓겠느냐.
바울은 단연코 "그럴 수 없다"(:2).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찌 또 살겠느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았음이다. 

우리의 구원받음은 함께 죽어 장사지내진 후
함께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 행하기 때문(:4).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근거/이유다(:7) .
즉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멸해짐으로써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6) 때문.

이와 같이 인과 관계를 명백히 서술해놓고 있건만
덮어놓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시니까
의로운 것으로 무조건 인정되는 것으로 아주 잘못 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어 나 위해 살 그 나가 없어졌기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 말을 남기지 않았다면
무조건 "선언 식의 의롭다 칭하심(칭의/稱義)을
고집할 것이 아닌가. 속말로 환장할 일이다. 

내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도 나를 의롭다 하시면
하나님도 거짓말하시는 것이 됨을 왜 미처 깨닫지 못하나.
죄가 무엇이냐ㅡ나를 위해 사는 자아중심의 일체이다. 
앞에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그 나 자신에데 대해
주님과 함께 죽고 무덤에 들어감이 되었다는 그 뜻이다. 
내가 존재해야 자아중심에게 종노릇할 것이 아닌가. 
죽은 것을 믿지 않으면 왜 세례는 받았는가.

이런 이치를 모르니까 무작정 세례를 주고 받는다. 
마치 특정 사실(주님의 나 위한 죽으심)을 믿는 징표인 양
세례를 함부로 주고 받는다ㅡ세례의 뜻을 도통 모르니까.
"믿음"의 징표가 아니라 죽은 징표이다. 
성령(예수님의 보혜사 되심)의 선물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 징표가 현실화, 구체화되어 내게 적용되는 것이다. 
주님을 내 영혼처럼 모심으로써 말 그대로 둘이 하나됨이다.


세례를 들먹이면서까지의 바울의 일갈은

죄 운운 할 것이면 세례는 무엇 때문에 받았냐 하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나 요한 사도나 베드로 사도나
죄를 짓지 말라고 연속 되풀이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죄를 지으면 자아중심으로 회귀하면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와해 붕괴되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를 
구별해서 설명한다(요 5:16).
후자의 경우가 형제 사랑의 결여와 같은 
부지중 짓는 죄다(요일 1:6~2:2).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진리를 알고 죄를 알면서도 짓는 것.
이렇게 고의적으로 "짐짓 짓는"(히 10:26)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것이요 그를 짓밟아(10:29)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6:6)이다. 

물론 구원 받은 즉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옛 사람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믿음에 의함이고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현저히 이루어지는 변화이므로
그 믿음 버리고 옛 자아중심으로 흐르면
위의 성경의 묘사와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이제는 사랑하는 나의 예수님 위해서만 살 때
자아중심이 발 붙일 여지가 없고 죄 지음(자아중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지 
처음부터 어렵게 복잡하게 이제껏 세뇌되어 온 대로의
사고방식을 따르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신 것이다. 

죄가 무슨 꿀이 발린 달콤한 것이 아니다.
인식 나름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믿음 나름이다.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한다"(갈 5:6) 함과 같다. 
요컨대 내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느냐 여부다. 
사랑이 없을 때 그것은 대개 믿지 않음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신학/神學을 버려야 산다ㅡ성경적 관점




신학이 성경이 아니고
성경이 신학이 아니다
성경+인간의 말=신학
∵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에 치중

그렇다고 신학이나 신학교를 부정함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면
세상이 신학교로 꽉 차도 좋은 것이다




간단한 이치








세상 모든 종교 행위는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모든 선을 행함이 자기 구원이 목표이니까.
그러면 자기 구원만 일단 받으면
선행 따위는 얼마든지 나 몰라로 일관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아중심 일변도입니다. 무의미, 무가치입니다.

일단 구원을 시켜놓고
자기 구원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쓰지 않게 하고나서
선과 의를 요구해야 정상입니다.
일단 구원부터 받게 한다ㅡ이것은 성경의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 종교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물 타기 작전을 위해
사탄으로부터 난 것이니까.

인간 스스로 영생을 욕망하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없는 것이 마귀가 이 세상 신이니까
다 주름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것을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런 인간 심리를 이용해
인생들을 멸망으로 유도하기 위한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종교에는 초능력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초능력이 바로 마귀 일당의 소행임을 입증하는 것.

자아중심, 이기주의, 욕심처럼
추악한 것은 없는데 이 모든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뿌리인 이런 자아중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그 역사적 배경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원균의 극히 대조적인 처신입니다.
원균 한 사람의 자아중심은 한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기에 족했고
이순신 한 사람의 무사(無私) 봉공(奉公) 정신은
침몰 직전의 나라 운명을 붙잡아 바로 세운 것입니다.
모두 <한 사람>의 거짓됨과 진실됨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쪼록 잘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서
성경의 하나님 말씀만이 유일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 성분(性分)을 가려내는 곳이 이 세상이고
여기서 올바르게 산 사람을 추려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간단한 이치입니다.
추악한 삶이 아닌 아름다운 삶.
내가 잘 나서 그런 아름다운 삶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와 선의 근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사랑을 깨닫고 배워 사람 사랑하는 것을
따라 실천하면 되는 것인데
특별히 악마적 기질이 아니라면
누구나 순리적으로 응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구원입니다.





2018년 7월 13일 금요일

나의 영원하신 짝으로 계신 주님




남자와 여자가 짝이라 하지만
영원 세상에서는 이런 짝의 개념이 없고
새로 창조되어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이들에게는
영원토록 각 사람의 짝은 주님이시다.
왜냐면 영혼과 육체로서의 대칭 관계이니까
이 이상 가는 짝은 없는 것. 






사람으로 계시면
아무리 성령으로 계셔도
그래도 모습은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ㅡ
그러나 지금까지 유포되어 있는 그런
소위 "예수님 그림"으로는 절대로 상상하시지 말 것.
지금은 완연한 초자연계 존재의 모습이신데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이실 수가 없는 것.

가장 여성다우시어 아름다우시고
가장 남성다우시어 늠름하신
이 둘을 완전 조화시키신 모습
이런 정도로 표현되실까.
어쨌든 모든 인생 중에 <최고의 모습>이실 것은 명백.

사람마다 함께 계시니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나를 닮으신, 나와 비슷하신
그 <최고의 모습>으로 계신다 할까.

부부가 함께 살면 서로 닮듯이.

그리고 이 모습은 바로
성부 하나님(아버지, 어버이)의 모습이심을 알아야.

성령으로 계심을 "보혜사(Comforter)"라 하신 것처럼
인자하시고 자애로우신 오직 우리를 위하시는 모습이지
엄엄하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멸망하는 자들에게만 "어린 양의 진노"(계 6:16).

일방적인 사랑은 없으니
양면성의 동시성이 사랑과 생명의 법칙의 요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힘써야(고후 5:10/고전 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