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또 하나의 나 자신이신 대칭 아담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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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람"은 "마지막 아담"이 아닌 우리의 "제2인생"을 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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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던 주님, 눈물 흘리시던 예수님





어떤 여성은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을 보고
인간적 진실성에 감동되어
믿음의 길로 들어섰다는 예도 있다.
간략한 기술(記述)로 정평이 나 있는 성경(신약)에
우셨다는 대목이 세 번이나 나온다.

거대한 세계 종교의 창시자 중 하나가 만일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면
우선 필자부터 그 인물에 대해 재고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터.
"석가"가, 혹은 모하메트가 .... 그러나 전무하다.

눈물ㅡ가식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간단 명료한 구원의 이치











지금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때





진리를 적대하는 사이비 이단일수록
그리고 정통 보수로 자처해도 진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 십자가 짐을 외면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리하여 위세 등등, 위풍 당당을 선호합니다.
교회당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지어 올리는 것도
그런 어쭙잖은 작태 중 하나입니다.
세상 권력 위에까지 군림하려 했던 로마 카톨릭도
단연코 그러합니다. 이쯤 되면 교리 분석할 필요조차 없이
사탄에게 사주 당하고 있는 반 진리라고
무조건 낙인 찍으면 무조건 통합니다. 
개신교가 국교로 지정되는 것 역시 완전 타락의 확증입니다.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세력화를 도모하는 경우
사탄에게 절한(항복한)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악마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이상
그 어떠한 세상 권력에 아부하는 것도 반/反 진리에 속합니다.
권력에 의존해 전도하려는 것 자체가
성경과는 상치되는 강제, 간섭이 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동네북처럼 하나님 믿는 이들이 얻어 터지기만 하는 것에
반발하여 일어난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전쟁(폭력)의 신"이라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모든 살상 행위는 심판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약에 대칭 아담께서 오심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무한 자비와 짝을 이루는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범죄함으로써 죄인이요 죽은 자가 된 인생들에게는
살겠다고 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일 죽을지도, 오늘 밤에 내 생애가 끝날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몇 년, 혹은 몇 십 년 연장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직 일구월심 희구하는 바는
영생을 보장 받는 일 외에는 아주 아무 것도 없는 것.

마치 백년이라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속임수이니, 자기 기만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판이니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간단한 이치요 사리 판단에 속하건만
사람들이 이제까지 자기 도취에 젖어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세상에 빠져 인사불성이 되는 것은
순수하게 사탄의 농락에 좌지우지되어 맥을 맺추는 결과입니다.
자연계 존재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연약한 일방적 열세입니다.
아담 스스로 범죄하여 자초한 결과이니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도 있듯이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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